
온테라 북동부. 붉은 별빛이 나리는 밤. 흰꼬리깃 산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북풍은 고목에 서리를 뿌려대었고, 가장 작은 여우는 주린 배를 움켜쥐었다. 눈밭을 구르던 도토리는 짧은 봄을 기다리며 잠에 들었다. 용병이라는 신분을 얻은 천치들은 차가운 불을 들이키곤, 세상을 호령하리라는 망상에 취한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퍼억.
그러나 고요의 무색함에도, 육중한 돌이 쪼개어지는 소리가 막사 한켠에 울려 퍼졌다. 곧 '나디아 하빗홀츠'의 천막이 거칠게 열어젖혔다. 분홍빛 머리칼을 흩날리던 온화한 칸티나 여성. 그의 아름드리 한 쌍의 뿔이 뿌리 끝까지 잘려 나가 있었다.
"나디아, 이게 무슨."
"에리히. 이거, 아무 데나 던져버려."
"왜지, 이러면 네가 ... "
피로한 기색이 만연한 여성이 남자의 손을 잡는다. 채 반절이 겨우 포개지고, 용병단장의 손에는 커다란 검은 뿔이 남겨져 있었다. 표면은 매끄러운 검은 빛을 내나, 그 속은 자줏빛의 찬란한 결정 구조를 품은. 살아온 무게만큼의 마력이. 두 눈에 새겨온 만큼의 빛을 품은 것. 아름다운 것.
"있지. 에리히. 나, 행복했던 게 없었어."
"... 무엇이?"
"듣는 자로 살면서."
감싸인 두 손에 힘이 들어간다. 피부에 압력이 가해지고, 손톱이 자국을 남긴다.
"이, 이 아이는 ... 안 그랬으면 해."
"자유롭게 살면 좋겠어. 원하는 만큼 세상을 보고, 쓸데없는 건 듣지도 말고."
"아무것에도 묶이지 않고."
"영원히, 그렇게 살았으면 해. 나는 ... "
"그게 뿔을 자른 이유라고."
조각난 칸티나가 침묵한다. 무어라 항변하러 달싹이는 입술. 불안한 듯 사방을 살피는 눈초리. 마치 죄를 짓고 도망친 죄인의 몸짓으로.
"마력이 줄어들면 ... 도움이 될까 봐 ... "
'감응력을 떼어내면 태중의 아이는 듣는 자가 되지 않으리라.' ― 실로 터무니 없는 논리. 그러나 에리히 하빗홀츠는 단 한 번도 마력의 부름을 듣지 못했다. 정령은 그에겐 규격 외의 야생동물에 불과하였으며, 불과 얼음의 춤은 단순한 구경거리 외의 의미가 될 수 없었다. 그의 귀는 오롯이 가족의 삶을 위해 기울어졌다.
부산스럽다. 인간을 사랑하기에도 바쁜 생애다.
결국, 용병단장 에리히 하빗홀츠는 전속 연금술사의 상상을 존중하기로 결심했다.
"나디아."
"그렇게 원하나?"
"원해. 내 아이만큼은."
" ... 도와줄게."
"에리히."
"그 아이에게 자유를 선물해줘."
"칸티나답게?"
"그냥 사람답게."
다음 날, 에리히 단장은 온테라의 새하얀 눈밭으로 나아갔다. 모든 빛을 먹어 치우는 구름의 장막. 그리고 두 뺨을 할퀴어대는 청명한 추위. 이윽고 짊어온 자루에서 두 검은 뿔을 꺼내든 순간,
태양이 구름 사이로 머리를 내밀었다.
이윽고 찬란한 빛. 파편은 품어온 장절함을 갈라진 틈으로 세상에 쏟아내었다.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리하여 남자는 자루의 입구를 닫았다.
겨울이 저물기 시작했다.